5대은행(왼쪽부터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농협은행)
5대은행(왼쪽부터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농협은행)

'금융라떼'는 2000년대 전후 국내 금융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흐름을 키워드 중심으로 알기쉽게 정리해주는 섹션입니다. 금융시장의 흐름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관련업종 취업을 계획 중인 독자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쉽게 접하는 은행 등에 대한 과거사를 알고 거래한다면 나름 쏠쏠한 재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섹션의 특성 상 다소 '꼰대'스런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금융권 종사자,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은행원'은 취준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입니다. 무려 1억원을 넘어서는 평균연봉과 함께 지금은 보기드문 연공서열제로 직업 안정성과 공기업 수준의 복지 혜택까지 갖췄으니 시쳇말로 '신의 직장'으로 불릴만 하죠.

여기에 외환 및 자산관리 분야에서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금융 전문가'라는 인식은 은행원들에게 큰 자부심입니다.

그런데 최근 은행원들 사이에서 '은행원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역대급 이자이익 및 성과급 잔치에 기인했던 정부와 정치권의 '은행 때리기'에 반발했던 목소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바로 '홍콩 H지수 ELS(주가연계증권) 사태'가 발단이 됐습니다. 해당 ELS의 전체 판매 규모는 무려 20조원에 육박하는데, KB국민은행을 비롯해 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에서 대거 팔려나갔습니다.

H지수 ELS는 홍콩항생지수가 3만선에 가까웠던 지난 2021년 상반기 판매가 집중됐는데, 3년이 지난 올 상반기부터 만기가 속속 돌아오면서 대규모 손실사태로 비화됐습니다. 현 시점의 홍콩항셍지수는 1만5500선을 오가는 중입니다. 올 상반기에만 무려 5~6조원의 손실이 우려된다고 하니 'ELS 사태'라 불릴만 합니다.

이번 ELS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해당사자별로 첨예하게 엇갈리는 듯 합니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가입자들은 자신에게 ELS 상품을 권유한 '은행(원)'을 원망할 수밖에 없고, 은행들은 고난도·고위험 상품 판매를 허가해준 금융감독당국에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당연히 금융당국은 은행 경영진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겠죠.   

사실 ELS 사태가 본격화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감독당국 수장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국내 은행들의 '이자이익 쏠림'에 대한 비판을 이어왔습니다. 비이자 이익을 끌어올려야하는 은행들 입장에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ELS 등과 같은 금융투자상품 판매입니다. 한 해 수조원을 벌어들이는 은행 입장에서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금융투자상품 판매에 높은 KPI(핵심성과지표)를 부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죠. 

이른바 '사태'로까지 비화된 대규모 손실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을 더합니다.

불과 3년 전에도 은행들은 라임·옵티머스, DLF(파생결합펀드) 등의 사모펀드 사태로 인해 대규모 피해 배상에 나서는 한편, 우리은행을 비롯해 일부 금융사 CEO들은 관리감독 미흡을 이유로 불명예 퇴진이라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당시 금융권 안팎에서는 고위험·고난도 투자상품을 은행에서 파는 게 적합한지를 놓고 논란이 제기됐지만, 금융당국은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을 통해 불완전 판매를 걸러내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ELS 사태가 금융당국의 '무지(無知)'와 은행 경영진의 '무능(無能)'이 결합된 참사라는 날선 비판도 나옵니다.

뒤늦게 금융당국은 고난도·고위험 상품의 은행 판매를 제한하는 내용을 검토하겠다고 나선 상황입니다. 이에 우리은행을 제외한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NH농협은행은 ELS 판매를 잠정 중단한 상태죠. 참고로 우리은행은 홍콩H지수 ELS 판매고가 경쟁사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이유로 ELS 판매 관리에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은행 경영과 관리감독의 실패에서 ELS 사태의 원인을 찾는 목소리와 별개로, 은행원들의 자기반성이 이어져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투자의 일차적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LS 투자자의 상당 부분이 이전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재투자했다는 점에서 불완전 판매 여부를 확실히 가려내는 일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행여나 있을 수 있는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해서도 안될 일입니다. 80-90대 고령 투자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서 철저한 조사도 병행돼야 합니다.

더불어 영업 현장에서 고객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있는 은행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필요해 보입니다. 본점 차원에서의 KPI 캠페인과 영업 압박이 ELS 사태의 주된 배경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자신의 안위보다 고객과의 신뢰 훼손에 큰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은행원들이 의외로 많다고 하니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최근 ELS 피해 관련 토론회에서 나온 각 은행들의 내부 블라인드 글로 이번 [금융라떼]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ELS 권유할 때 MSG 가미하지 않나요? 그냥 원금손실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아무도 가입 안합니다. '수익률 좋죠? H지수가 역사적으로 지금처럼 떨어진 적이 없어요. 물론 원금손실 가능성은 있지요. 하지만 은행이 지금까지 판 ELS는 대부분 원금 상환이 됐어요. 과거 통계가 있어요.' 이런식으로 말하면 한번도 ELS에 가입하지 않은 분도 은행원 추천에 가입합니다. 그런데 투자위험 고지했으니 무조건 고객 책임이다? 이게 다 은행 본연의 업무인 예금 및 대출에 집중하지 않고 고객 타겟팅도 없이 비이자 푼돈 벌겠다고 생긴일 아닌가요?"

"컨콜 들으면서 제 자신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고객들이 너무 불쌍해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손실난 고객님들께 최선을 다해 당행의 솔루션을 제공해 주세요. 100억 클럽 해외여행, 제발 그 돈 고객들에게 써주세요. 제 스스로 은행원이라는 게 부끄럽습니다"

"저부터가 완전판매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적이니 어쩔 수 없이 좋은 상품으로 둔갑시켜 팔았지, 과연 (H지수가) '고점'이라는 이유로 고객을 돌려보낸 직원들이 몇이나 될까요"

"양심에 찔려 제보하고 싶어요. '쿠폰 금리만 제시했지 예금처럼 팔았고, 은행에서도 과거 10년동안 원금손실난 적 없다. 나도 가입했다' 이런식으로 세일즈했지, 카톡방에 실적 눈도장 찍어야 하니 정상적인 영업은 안했던 것 같아요. 우리야 욕먹으면 그만이지만 고객들 허공에 날라간 돈은 어찌하나요"

"은행원인 나부터도 진솔하게 투자성향 분석하면 제일 보수적인 등급이 나오는데, 진짜 고객한테 맞게 작성하면 세일즈가 아예 안되죠"

"일반적으로 투자성향 분석대로라면 대부분의 고객은 정기예금, MMF 정도만 가입했어야 합니다"

"(상품 판매) 프로세스대로 교과서처럼 세일즈 하면 힘듭니다. 저희도 가이드대로 세일즈하고 싶어요. 그런데 PB 의견 없이 고객이 결정하는대로만 하겠다는 PB에게 누가 가겠어요? 투자성향 분석 결과가 보수적으로 나와 (상품 판매가 어려워) 죄송하다고 하는 PB가 과연 있을까요"

"저희를 믿고 ELS 가입하신 분들이 진짜 고객일텐데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니 가슴이 너무너무 아픕니다. '영원히 잠들고 싶다' 하시고 가셨는데 행장님께서 해결해주세요"

"전 정말 다 그만두고 싶네요. 너무너무 지치고 힘이 듭니다. 눈물만 납니다" [뉴스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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