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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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라떼'는 2000년대 전후 국내 금융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흐름을 키워드 중심으로 알기쉽게 정리해주는 섹션입니다. 금융시장의 흐름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관련업종 취업을 계획 중인 독자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우리 주변에 쉽게 접하는 은행 등에 대한 과거사를 알고 거래한다면 나름 쏠쏠한 재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섹션의 특성 상 다소 '꼰대'스런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민간은행이 수익 창출에 큰 도움을 준 VIP 고객의 자녀를 채용하겠다는 데 뭐가 문젠지 모르겠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업무 방해' 피해자는 저희 아닌가요?"

2018년 금융권이 채용비리 이슈로 한참 논란이 됐을 당시 한 시중은행 직원이 무심코 던진 말입니다.

최근 하나금융그룹의 '채용비리' 관련 판결이 나오면서 은행권의 특혜 채용 논란이 재차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일 법원은 하나은행이 특정 지원자에게 특혜를 주면서 탈락한 원고(공채 지원자)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원고가 요구한 정신적 위자료를 포함해 합격시 보수인 2억1000만원에 비해 크게 깎인 액수로, 1심 판결(5000만원)보다도 배상액이 줄었습니다.

하나은행 초봉이 지난해 말 기준 6000만~8000만원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초봉의 절반에도 못미칩니다. 원고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하겠네요. 

당시 하나은행은 상위권 대학 출신을 합격시키기 위해 일부 지원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했는데, 해당 은행 측은 이를 '재량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알아서 필요한 직원을 뽑겠다는데 뭐가 잘못됐냐'는 논리죠.

하나은행은 이번 배상 판결과 별개로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의 채용비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말 이미 2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300만원이라는 '유죄'를 판결받고 최종심을 기다리는 중이죠. 앞서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터라 하나은행으로서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현재 하나금융 측은 상고에 나선 상황으로, 자진사퇴보다는 '시간 끌기'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 관련 법상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금융회사 임원을 유지할 수 없는데,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는 자리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현재 함 회장이 받는 혐의는 '남녀고용평등법 위반'과 '업무방해'입니다. 함 회장이 하나은행장으로 재직했던 2015~2106년 KB국민은행의 고위직 임원으로부터 그의 아들이 하나은행 공채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부에 '잘 봐줄 것'을 지시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기에 함 회장은 남녀 합격 비율을 4대 1로 맞추라고 지시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은행 뿐 아니라 은행권의 특혜 채용은 공공연한 비밀로 인식돼 왔습니다. 당시 주요 은행의 행장 및 금융그룹 회장의 친인척들이 해당 은행에 근무하고 있다는 것도 암암리에 전해졌던 사실이었죠. 높은 연봉과 함께 공기업 수준의 복지혜택까지 누릴 수 있으니 정치권을 비롯해 채용 청탁이 빗발쳤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보입니다.

이같은 은행권 채용비리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난 계기는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의 구속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지난 2016년 국정감사에서 '우리은행 신입사원 공채 추천현황'이라는 내부 문건이 공개됐습니다. 문건에는 감독기관인 금융감독원은 물론,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은 물론 우리은행에 거액의 자금을 맡긴 VIP 고객들의 채용 청탁을 통해 합격시킨 정황이 담겨 있어 적잖은 파문을 불러왔습니다.

이같은 정황으로 볼 때 '정치권 연줄이 없으면 임원 달기도 어렵다'는 당시 소문이 마냥 빈말은 아니었나 봅니다. 우리은행의 경우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대주주였던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기 힘든 지배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해당 사건을 계기로 은행권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졌고 이후 KB국민은행을 비롯해 신한은행, 하나은행 등에서도 특혜 채용 정황이 줄줄이 드러났습니다. 일부 은행은 '아빠가 면접관'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불합격 대상인 명문대 출신들의 면접점수를 조작해 합격시키는 일도 자행됐습니다. 금융지주 및 은행 사외이사의 친인척과 VIP 고객의 자녀들을 별도 관리했던 정황도 포착됐죠.

하지만 이 가운데 유죄 확정을 받은 우리은행만이 부정입사자를 퇴사 조치했을 뿐, 다른 은행들은 '위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은행장 및 금융지주 회장들은 결국 무죄 판결을, 인사 담당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고, 채용비리로 탈락한 피해자 구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채용비리가 앞으로도 반복될 개연성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채용비리는 청년들에게 씻기 힘든 박탈감을 주는 사회적 해악이라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지만, 이를 막을 법적 장치가 미비하기 때문이죠.

재판부 역시 낮은 수위의 처벌 배경으로 '채용비리를 단죄할 별도의 처벌 조항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업무방해' 죄가 적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죠.

상황이 이런데도 국회는 여전히 요지부동입니다. 앞서 정의당 등 야권 주도로 2021년과 2022년 각각 '채용비리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논의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관련법을 마련해야 하는 국회의원들 역시 잠재적 피해자가 아닌 채용 청탁의 주체에 가깝기 때문이겠죠.

'공정과 상식', '청년들이 행복한 나라'가 정치적 구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어떤 법안부터 처리해야할지 너무나도 자명해보이는데 말입니다. [뉴스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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