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분쟁. 거창한 용어처럼 들리지만 모든 분쟁의 시작에는 계약서와 약관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계약서 또는 약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용어 해석이 모호해 분쟁으로 번지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를 제대로 알면 합리적 거래가 가능합니다. 기업은 기업대로 민원을 줄일 수 있고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권익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수십, 수백여장에 달하는 계약서와 약관을 소비자가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뉴스w는 소비자보호와 국민의 알권리, 언론의 순기능 역할을 위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계약서와 약관을 쉽게 풀어 전달하겠습니다. 계약서 내용과 관련하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전문 기자들이 다각도로 취재해 명쾌한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컨트랙W는 'Contract knoW' 영문의 준말로 계약서를 알다 혹은 깨닫다는 뜻입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한달 전 '아이템 매니아'라는 사이트를 이용해 게임 '라그나로크 온라인(라그나로크)'의 재화 '제니'를 300만원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구매한 제니가 악성 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들어진 정상적인 제니가 아니라는 통보를 운영진 측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운영진은 제가 구입한 제니를 회수해 간 것도 모자라 현금거래가 약관 위반이라는 이유로 이용 제한 조치도 진행했습니다. 제가 악성 프로그램을 이용한 것도 아닌데 돈을 주고 구매한 제니를 압류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가요? 너무 억울합니다.

지난 2001년부터 그라비티가 서비스하고 있는 장수 온라인 MMORPG 라그나로크에서 최근 논란이 된 사례를 각색한 내용이다.

게임 내 재화를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중개 사이트 아이템 매니아에서 '스피드'라는 닉네임을 가진 이용자가 판매한 제니가 불법 프로그램으로 생산된 것으로 파악됐다. 라그나로크 운영진은 해당 재화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용자를 이용제한 제재를 가한 뒤 문제가 된 제니를 회수했다. 물론 회수 이후 별도의 보상은 지급하지 않았다. 현재 인터넷상에서 해당 사건은 '스피드 제니' 사태로 명명돼 커뮤니티 사이에서 갑론을박을 일으키고 있다.

스피드에게 제니를 구매한 사람은 현금을 주고 재화를 구매했지만 눈 뜬 채로 이를 빼앗긴 꼴이 된 상황이다. 피해 규모는 약 80명, 6000만원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라비티가 지난 2001년부터 국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라그나로크 온라인'. 사진='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그라비티가 지난 2001년부터 국내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라그나로크 온라인'. 사진='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쉽게 예를 들어 비교해 보자. 현재 유실물법에 따르면 장물을 구매한 사람은 해당 물건이 장물인지 몰랐을 경우 처벌에서 면제된다. 그런데 이번 피해자들은 별도의 구제책도 없이 구매한 물건이 운영진 측에 회수됐다. 또 조사에 따른 계정 이용 제한 조치도 덤으로 껴안았다.

어떤 부분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해답은 약관에 있다.

바로 라그나로크는 애초에 유저 간 '현금 거래' 자체를 제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템 현금 거래가 불법은 아니지만, 이를 행했을 시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약관에 피해들은 이미 동의를 하고 게임 서비스를 이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매자들은 현재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이용제한정책' 내용 중 일부. 사진='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이용제한정책' 내용 중 일부. 사진='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라그나로크의 '이용제한정책'에는 게임 내 수단을 통해 아이템 등을 현물이나 현금 등으로 교환하거나 거래하는 경우, 또는 이를 시도하는 경우 제재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또 '운영정책'을 살펴보면 게임 내 제재대상에는 현금거래가 포함돼 있다.

구체적으로 쿠폰거래와 같은 현물거래를 유도하는 행위, 현금거래 사이트나 직거래 등으로 계정이나 아이템 판매를 유도하는 행위, 제니를 받고 결제를 해주는 행위, 서버간 거래나 타 게임간 거래를 시도하는 행위 등으로 현금거래를 규정하고 있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운영정책' 내용 중 일부. 사진='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운영정책' 내용 중 일부. 사진='라그나로크 온라인' 홈페이지

운영정책 내에는 불법 프로그램 사용이나 버그 약용으로 아이템과 제니 복사 등 행위를 한 이용자와 관련 계정은 이용제한이 될 수 있다고도 적혀있다. 또 고의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해당 행위로 얻은 아이템과 제니는 회수되거나 조정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게임사 입장에서는 약관에 따라 불법 프로그램으로 생성된 제니를 회수하고 현금거래를 통해 이를 획득한 이용자들을 제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화를 빼앗긴 구매자들 입장에서는 본인이 불법 프로그램을 이용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똑같거나 유사한 수준의 제재 조치를 받는다는 점이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 현재 국내법상 아이템 매니아 등 중개 사이트 이용과 현금거래 자체가 불법이 아닌 것도 논란이 커지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피해자 측은 현금거래를 그라비티가 게임 내 경제 유지를 위해 사실상 묵인하고 있었지만, 버그 논란이 터지자 게임사 이미지가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해 해당 이슈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만 제재를 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해 그라비티 관계자는 "해당 사안에 대해서 조치를 진행 중"이라며 "현시점에서 자세한 답을 낼 수는 없고 모든 조치가 마무리되면 별도 공지를 통해 안내가 진행될 예정"이라며 답을 피했다.

다만 지난 6일 라그나로크 운영진은 추가 공지사항을 통해 "운영 정책은 모든 고객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시스템 악용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현금거래가 확인될 시 제재가 진행된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이템 현금거래 중개사이트 '아이템 매니아' 홈페이지. 사진='아이템 매니아' 홈페이지 캡처
아이템 현금거래 중개사이트 '아이템 매니아' 홈페이지. 사진='아이템 매니아' 홈페이지 캡처

실제로 국내에서 서비스하는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 안에서는 아이템 매니아와 같은 사이트를 통해서 혹은 개개인을 통해서 현금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게임사가 '합법' 사이트인 아이템 매니아를 당사 약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규제할 명분은 없으며, 현금거래가 의심되는 이용자들 모두를 조사해 제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현금거래를 통해 형성된 시세가 게임 내 경제 시스템을 일정 부분 지탱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다. 이에 게임사들은 약관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중개사이트를 통한 현금거래를 어느정도 방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도경 보좌관(이상헌 국회의원실)은 "사실상 게임사들이 현금거래를 방조, 묵인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며 "현금거래를 통해 아이템을 취득하는 이용자는 법으로는 합법, 약관 상으로는 위반인 상황에 놓여있어 사실상 '법의 사각지대'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템 매니아 등 현금거래 사이트를 법적인 규제에 놓게 하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게임 내 생태계에 미칠 파장을 고려할 시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다"며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같은 회색지대에 놓인 사례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구매자 입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구제책은 게임사가 아닌 중개 사이트에서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이철우 변호사(한국게임이용자협회장)는 "'옥션' 등 판매자와 구매자 중개를 통해 수익을 내는 플랫폼은 수수료를 통해 수익을 내기 때문에 판매되는 물품에 대한 보증을 할 의무가 있다"며 "이번 사태는 아이템 매니아 측에서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환불이나 보상 등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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